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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구, baseball, 野球

통산 400승 불세출의 명투수 가네다 마사이치 세상을 떠나다. 야구인 가네다의 일생.

by 까메오레 2019. 10. 23.

2019년 10월 6일. 일본프로야구의 큰 별이 지다.

 

(故)가네다 마사이치

 

일본프로야구에서 유일무이한 통산 400승을 거둔 불세출의 명투수 가네다 마사이치(金田正一)가 패혈증으로 도쿄 시내 병원에서 숨을 거두었다. 향년 86세.

 

가네다의 죽음을 애도하며 그의 일생을 돌아본다.

 

 

재일 한국인 김경홍. 그러나 그는 가네다 마사이치였다.

 

가네다 마사이치는 재일 한국인 2세며 한국 이름은 '김경홍'이다. 1933년 8월 1일 일본 아이치현(愛知県)에서 태어났다. 부모가 한국인이었지만 일본어를 쓰며 일본 사람들과 일본 문화를 접하며 살아왔기에 그는 일본인이나 다름없다. 게다가 1959년 일본으로 귀화했다. 

 

고쿠테쓰 시절의 가네다

 

일본엔 재일한국인 선수가 많다. 근거 없는 소문도 많지만 스스로 한국인임을 밝힌 선수도 있다. 재일한국인 선수로 알려진 예는 한신 타이거스의 가네모토 도모아키(金本知憲), 히야마 신지로(桧山進次郎), 히로시마 카프의 아라이 다카히로(新井貴浩), 요코하마 DeNA 베이스타스의 모리모토 히쵸리(森本稀哲) 등이 있다. 모두 은퇴한 선수들이지만 현역 중에도 한국인의 피를 이어받은 선수들이 많이 있으리라 본다. 일본은 한국과 지리적으로 가까워 과거 일본으로 이주한 한국인이 많았기에 어찌 보면 당연한 일이다. 

 

이들의 핏줄이 한국인임에는 분명하지만 난 편협한 국수주의에는 빠지고 싶지 않다. 이들의 부모나 조부모가 한국인 것은 맞으나 이들은 일본에서 일본인처럼 살아온 엄연한 일본인들이다. 한국인의 DNA를 이어받았을 뿐 생각도 언어도, 삶의 방식도 그렇다. 

 

물론 장훈(張本勲, 일본명 하리모토 이사오)같이 끝까지 한국인의 긍지를 가지고 귀화하지 않은 선수도 있다. 다혈질에 다소 극단적인 코멘트로 호불호는 분명히 갈리지만 나는 온갖 차별을 극복하고 위대한 업적(NPB 역대 통산 최다 3,085안타)을 세운 그의 불굴의 의지를 정말 존경한다.

 

 

고쿠테쓰 스왈로스 입단. 엘리트 코스를 걷다.

 

1933년 8월 1일 아이치현에서 태어난 가네다는 어려서부터 엘리트 코스를 밟아온 선수였다.

 

1950년 신인 시절의 가네다(17세)

 

집은 가난했지만 부모님이 물려주신 훌륭한 재능 덕분에 학창 시절 한 번도 학비를 낸 적이 없을 정도로 특별 대우를 받았다. 1950년, 고교 3학년 봄 고교야구 지역예선대회에서 탈락한 뒤, 학교를 중퇴하고 당시 새롭게 팀을 인수한 고쿠테쓰 스왈로스(国鉄スワローズ, 야쿠르트 스왈로스의 전신)에 스카우트되어 입단하게 된다.

 

신인 시절 애띤 얼굴의 가네다

 

고쿠테쓰는 17살의 좌완투수 가네다를 즉시 전력감으로 보고 적극적으로 기용, 가네다는 데뷔 시즌 시즌 8승을 거둔다. 

 

이후 가네다는 승승장구.

 

2년 차 시즌인 1951년부터 20승을 거두더니, 이후 1964년까지 무려 14년 연속 20승이라는 대기록 쓰게 된다.

 

가네다의 투구 연속 장면

 

가네다가 고쿠테쓰 소속으로 올린 성적은 찬란함 그 자체였다.

 

요미우리로 이적하기 전까지 사와무라상 3회(MLB의 사이영상 같이 최고의 투수에게 주는 상. 1956, 1957, 1958), 베스트나인 3회(포지션별 최고의 선수에게 주는 상. 1957, 1958, 1963), 일본시리즈 MVP(1968), 올스타전 MVP 2회(1960, 1964), 최다승 3회(1957, 1958, 1963), 최우수 방어율 3회 중 2회(1957, 1958 *1965년에는 요미우리 소속으로 수상), 최다 탈삼진 10회(1951, 1952, 1953, 1955, 1956, 1958, 1959, 1960, 1963, 1964), 투수 3관왕(한 시즌 한 명의 투수가 최다승, 최우수 방어율, 탈삼진 타이틀을 동시에 차지하는 일. 1958) 등 이루다 열거할 수 없을 정도다.

 

1955년 미일올스타전에서 뉴욕 양키스의 미키 맨틀과

 

 

공 6개로 끝내줄테니 집에 갈 준비나 해

 

가네다는 투수에게 최고의 영예라 할 수 있는 노히트노런(1951)과 퍼펙트게임(1957)을 달성했다.

좌완투수의 퍼펙트게임은 지금까지도 가네다가 유일하다. 

 

1957년 8월 21일 주니치와의 더블헤더 2차전.

선발 등판한 가네다는 전날 일으킨 복통으로 컨디션이 좋지 못했지만 8회말까지 24타자를 완벽하게 요리한다. 

9회말. 선두타자와 볼카운트 1볼 2스트라이크에서 주니치 타자의 하프 스윙을 심판이 스트라이크로 판정. 이 판정에 불만을 품은 주니치 감독과 코치가 맹렬히 항의하자 관중들이 그라운드에 난입하기 시작해 무려 43분 동안 경기가 중단된다.

겨우 그라운드가 정리되고 경기가 재개되자 가네다는 아무렇지도 않은 듯 의기양양한 표정으로 동료에게 다음과 같이 호기 있게 말한다.

 

"앞으로 공 6개로 끝내줄테니 어서 집에 갈 준비나 해."

 

가네다는 이후 실제로 두 타자를 연속 삼구삼진으로 잡아내며 역대 4번째로 퍼펙트게임을 달성한다. 

 

1957년 8월 21일 주니치전. 1-0 상황에서 9회말 주니치 타자의 하프 스윙을 두고 심판에게 맹렬히 항의하는 주니치 감독과 코치. 마운드엔 가네다.

 

 

신예 나가시마 시게오와의 대결. 프로의 긍지를 보이다.

 

1958년 4월 5일 요미우리와의 개막전(고라쿠엔 구장).

가네다는 그해 신인으로 데뷔한 일본프로야구의 국민적 영웅, 미스터 자이언츠 나가시마 시게오(長嶋茂雄)를 상대로 4연타석 4삼진을 빼앗는다. 대형 신인과 당대 최고 투수의 대결은 엄청난 반향을 일으켰고, 이 장면은 일본프로야구 역대 최고 명장면으로 꼽힌다.

 

1958년 요미우리와의 개막전. 대형 신인 나가시마와 당대 최고 투수 가네다의 대결은 팬들의 이목을 집중시켰다

 

1958년 개막전에서 나가시마를 상대로 4연타석 삼진을 빼앗는 가네다

 

나가시마를 4연타석 삼진으로 잡아내긴 했지만 가네다는 모든 공에 혼을 담아 풀스윙하는 나가시마를 보며 언젠 대성하리라 직감한다. 참고로 나가시마는 첫 4타석은 연속 삼진을 당했지만 가네다가 요미우리로 이적하기 전인 1964년까지 가네다를 상대로 타율 .313 18홈런을 기록. 역대 가네다를 상대로 가장 많은 홈런 쳐냈다. 

 

1958년 6월 4일자 주간 베이스볼 표지를 장식한 가네다

 

가네다는 1958년에 통산 200승을 달성했고(25세), 1963년에는 300승을 달성하며(30세) 역대 다승 1위로 올라서게 된다. 그리고 이듬해인 1964년에는 전후무후한 14년 연속 20승을 달성. 고쿠테쓰에서만 통산 353승을 거둔다. 

 

 

요미우리 이적. 그리고 전후무후한 400승 달성.

 

가네다는 1964년 시즌이 끝난 후 매각 위기에 처한 고쿠테쓰를 떠나기로 결심. 10년 선수제도(FA 제도의 전신. 10년 동안 현역 선수로 뛰게 되면 자유롭게 이적할 수 있는 권리)로 요미우리로 이적한다. 

 

1964년 12월 23일 요미우리 입단 기자회견. 좌측부터 가네다, 쇼리키 마쓰타로 구단주, 가와카미 데쓰하루 감독

 

고쿠테쓰를 떠나기로 결정한 가네다에게 고향팀인 아이치현의 주니치는 계약금 1억 엔과 은퇴 후 감독 자리 보장이라는 엄청난 계약조건을 제시하지만 가네다는 한 번이라도 좋으니 나가시마, 오 사다하루와 같은 팀에서 플레이해보고 싶다는 일념으로 결국 요미우리와 계약하게 된다.

 

왼쪽부터 젊은 시절의 나가시마, 가네다, 오 사하다루

 

요미우리로 이적한 가네다는 고쿠테쓰 시절만큼의 성적은 남기지 못한다. 하지만 당시 요미우리의 감독이었던 가와카미 데쓰하루(川上哲治)는 가네다의 성실한 훈련 태도를 높이 평가했고, 팀의 젊은 선수들이 그를 통해 좋은 영향을 받길 바랬다.  젊은 시절의 나가시마도 슬럼프에 빠지면 가네다에게 조언을 구하며 부진을 극복하곤 했다. 요미우리에서 거둔 승수는 47승에 지나지 않았지만 가와카미 감독은 가네다 실적과 경험을 높이사 그를 개막전 선발에 4번(1965, 1967, 1968, 1969)이나 등판시켰다. 요미우리는 가네다가 이적한 1965년 시즌부터 V9(일본시리즈 9년 연속 우승)의 영광을 맛보게 된다.

 

요미우리 소속으로 활약한 5년간, 연속 14년 20승 기록이 끊어지고 타이틀이라곤 최우수 방어율을 한 번 밖에(?) 따내지 못하는 부진(?)을 면치 못한 가네다는 이후 나이가 들며 점점 성적이 떨어지게 된다.

 

주니치전에서 전인미답의 400승을 거둔다(1969.10.10)

 

400승 달성 후 헹가레를 받는 가네다

 

가네다는 현역 마지막해였던 1969년, 주니치 전에서 가와카미 감독의 배려로 일본 프로야구 역대 최초 통산 400승의 위업을 달성한다. 이후 그해 11월 30일 기자회견을 통해 은퇴를 표명한다. 요미우리에서의 쌓아 올린 업적은 고쿠테쓰 시절의 성적에 비할 바가 못되지만, 요미우리는 이전에도 없었고 앞으로도 없을 400승의 대업을 기리고자 가네다의 등번호 34를 영구결번으로 지정했다.

 

400승 기념 위닝볼을 들고
1969년 11월. 은퇴 기자회견 중인 가네다.
시범경기에서 은퇴세리머니를 하는 가네다(1970.4.2)

 

가네다의 속구는 시속 160km? 이도류의 원조는 가네다?

 

20년의 현역생활동안 그의 주무기는 직구와 낙차 큰 커브였다. 그의 속구는 초속과 종속이 거의 차이가 없다는 평가가 있을 정도로 위력적이었다. 그는 은퇴할 때까지 포수의 사인을 받지 않고 볼배합, 구종, 코스를 스스로 선택했다. 쉽게 얘기하면 넘치는 자신감으로 자기가 던지고 싶은 대로 던진 거다.

 

당시에는 스피드건이 없었기에 정확한 직구 스피드를 알 순 없으나 가네다를 상대했던 선수들은 입을 모아 150km 후반대에서 160km 사이라고 증언했고 가와카미도 가네다를 가장 빠른 공을 던지는 일본인 선수라 말했다.

 

요미우리 시절의 가네다

 

일본프로야구의 전설적인 포수 노무라 카츠야(野村克也, 통산 657홈런)는 가네다의 커브를 보며 다음과 같이 말했다.

 

'타자의 머리 높이로 날아오던 공이 갑자기 뚝 떨어지더라. 볼이라고 생각했는데 스트라이크존을 통과했다. 속구도 같은 높이로 날아오니 쉽게 대응할 수 없었다'

 

 

요미우리 이적 후 현역 말미에는 포크볼, 슬러브, 고속커브, 투심패스트볼 등 다채로운 변화구를 던지며 떨어지는 힘을 기술로 보완. 기교파 투수의 모습을 보이기도 했다.

 

가네다는 타격도 출중했다. 통산 38홈런을 기록했고 고의사구도 8개나 된다.

그는 오타니 쇼헤이처럼 타격이 뛰어난 투수였다. 현역 통산 38홈런은 투수 역대 1위이며 입단 후 11년 연속으로 홈런을 쳐냈다. 야수로도 출전해 2홈런을 기록했고 고의사구를 8번이나 기록했다. 원조 이도류(투타겸업)는 오타니가 아니라 가네다일지 모른다.

 

가네다의 동생들과 조카도 프로야구 선수였는데 1969년 올스타전에서 당시 신인이었던 그의 친동생 가네다 도메히로(金田留広)와 투타 대결을 벌이기도 했다. 결과는 타자 가네다 2루수 플라이 아웃.

 

 

감독 위의 감독

 

가네다는 현역 시절 남긴 엄청난 성적과 거친 성격으로 감독 위의 감독으로 군림했다. 감독이 투수 교체 사인을 보내기도 전에 마운드에서 내려오거나 오르는 일도 다반사. 가네다의 공을 받아주던 포수는 그의 거친 성격을 맞춰주는 일이 가장 힘들다고 말할 정도였다. 규모가 작은 구장에서 등판하게 되면 불만을 노골적으로 드러내기도 했다.

 

승리에 대한 집착때문에 신인 선수가 4회까지 호투를 펼친 경기에 본인이 직접 심판에게 투수 교체를 지시하며 마운드에 오르기도 했다. 당시의 대졸 직장인의 평균 급여가 1만 엔이었던 시절, 가네다는 무려 100만 엔에 이르렀다. 지금 연봉으로 치면 10억 엔 정도의 규모라 하니 그의 실력과 압도적인 존재감이 어떠했을지 가히 짐작이 간다.

 

1967년 6월 5일호 주간 베이스볼

 

 

대기록은 철저한 자기 관리에서 나온다

 

가네다는 좋은 컨디션을 유지하기 위해 자신의 일상생활을 철저하게 다스렸다.

자신의 400승은 철저한 자기 관리에서 나왔다고 공공연히 말해왔던 가네다. 특히 어깨가 식지 않도록 각별한 주의를 기울였다고 하는데 다음과 같은 지침을 두었다고 한다. 

 

*어깨가 식지 않게 하기 위해 차량에 에어컨을 설치하지 않는다

*벤치 클리어링이 벌어져도 왼팔에 타월을 반드시 감고 나간다

*아들을 왼팔로 안지 않는다

*운전하면 예민해지므로 항상 운전기사를 둔다

*주행 중 창문을 열면 어깨가 식을 수 있어 왼쪽 좌석에는 절대 앉지 않는다

*여름철에도 어깨 보호를 위해 긴팔 언더셔츠를 입는다

*면도를 할 때 손이 벨 수 있으니 전기면도기만 사용한다

*외출할 때는 발톱이 깨지지 않도록 샌들은 신지 않는다

*부분 마사지가 아닌 전신 마사지를 받는다. 침, 부항, 뜸 치료는 받지 않는다

*시즌이 끝나면 푹 쉰다. 잘 쉬는 것도 트레이닝이다

 

 

투수는 어깨가 아닌 하체로 던진다. 양양 섭취도 훈련이다.

 

가네다는 투수의 하체 훈련을 무엇보다 강조했다. 투수는 어깨나 팔이 아니라 하체로 공을 던진다는 지론을 가지고 있었다. 그의 튼튼한 하체는 어린 시절 먹을거리를 사기 위해 리어카를 끌고 시장을 오가는 동안 만들어졌다. 그는 감독 시절, 공을 던지지 않아도 좋으니 뛰기만 하라라는 말을 했을 정도로 하체 훈련을 중요시했다. 

 

하체 강화를 그 무엇보다 강조했던 가네다. 그는 누구보다도 연습량이 많은 선수였다.

 

가네다의 연습량은 그 누구도 따라가지 못했다. 스프링캠프가 시작되면 새벽 5시 30분부터 일어나 러닝, 스트레칭, 펑고 등을 소화했다. 이런 가네다를 보며 연습벌레를 자부하던 나가시마 시게오도 혀를 내두르곤 했다.

 

그는 몸을 만들기 위한 영양 섭취에 심혈을 기울였다. 현역 시절 입버릇처럼 좋은 음식 섭취의 중요성을 강조했다. 

스프링캠프가 시작되면 당시 직장인의 월급에 상당하는 돈을 들여 고급 식재료를 구해와 직접 음식을 만들어 동료들과 함께 나눠먹곤했다. 롯데 감독 시절에는 좋은 육질의 고기를 선수단에 제공하도록 구단에 요청하기도 했고, 당시엔 보기 힘들었던 고가의 미네랄워터를 마시도록 하기도 했다. 영양섭취와 몸 관리의 중요성을 시대를 앞서 인식했던 셈이다.

 

 

팬들을 위해서라면 선수와 심판에게 발길질도 서슴지 않다

 

가네다는 현역 은퇴 후 롯데 오리온즈에서 감독을 2차례 역임한다.(1차-1973~1978, 2차-1990~1991)

 

1976년 롯데 감독 재임시절의 가네다. 오른쪽은 요미우리 감독 나가시마

 

사람들은 자기중심적 태도와 거친 성격의 소유자인 가네다의 감독 부임을 부정적으로 바라보았다. 하지만 가네다는 명투수 출신답게 팀의 투수력을 철저하게 강화. 1974년 시즌에는 리그 최소 실점, 최다승 투수 배출, 방어율 10위 안에 주축 투수 3명 진입 등, 부진에 허덕이던 팀을 리그 우승으로 이끌었고 주니치와의 일본시리즈까지 제패했다. 취임 2년 만에 이뤄낸 성과였다. 

 

감독으로서 정점에 오른 가네다는 가는 곳마다 팬들이 들끓었고 홈구장은 만원을 이뤘으며 우승 퍼레이드에는 수많은 팬들이 몰렸다.

 

1974년 가네다는 일본시리즈를 제패했다

 

1974년 우승 퍼레이드. 수많은 팬들이 몰려들었다.

 

 

가네다 감독. 외면받던 퍼시픽리그에 한줄기 빛이 되다.

 

당시 퍼시픽리그는 센트럴리그에 비해 인기가 거의 없었다. 관중석이 텅텅 비기 일쑤였고 팀과 선수가 매스컴에 노출되는 정도가 매우 적었다. 이런 퍼시픽리그에 현역 시절의 엄청난 성적과 스타성을 가진 가네다의 감독 부임은 매스컴과 팬들의 주목을 끌기에 충분했다.

 

1974년 팬들의 이목을 끌기위해 모회사 광고에 직접 출연한 가네다

 

가네다는 재임 시절 팀의 유니폼을 직접 디자인하고, 관중들에게 스낵을 나눠주거나(모회사가 제과회사), 선수 오리지널 상품 판매, 그라운드 위에서 선수들과의 사진 촬영을 실시하는 등 지금은 정착화된 팬서비스를 당시 획기적으로 실시하여 호평을 받았다.

 

다혈질적인 성격과 승부 기질, 시합 전 다리를 높이 들어 올리는 특유의 워밍업 등으로 현역 선수보다 더 많은 인기를 끌었다. 주말이면 홈구장이었던 가와사키 구장이 꽉 들어찼고 요미우리 일색이었던 TV 중계가 편성도 되기도 했다. 그는 팬들의 이목을 집중시키고자 모회사 롯데의 TV광고에 직접 출연한 적도 있다.

 

트레이드마크였던 가네양 댄스(가네양은 가네다의 애칭)

 

가네다는 성격이 괴팍하기로 소문난 사람이었다. 벤치 클리어링이 벌어지면 누구보다 먼저 적극적으로 뛰어들며 발길질도 서슴지 않았다. 그의 이런 성격 때문에 1990년 6월 23일 세이부 전에서 심판 폭행 사건으로 벌금 100만 엔, 출장정지 30일의 처분을 받았다. 퇴장을 당하는 경우도 다반사였다.

 

지금은 상상할 수 없는 발길질. 하지만 당시엔 많은 화제를 모았다.

 

성격이 불같은 가네다였지만 그는 이러한 격한 행위를 일종의 퍼포먼스였다고 주장했다. 심판에게 격렬한 항의를 하기 전 TV 카메라가 보이지 않는 곳에서 먼저 심판에게 격한 항의를 예고하며 양해를 구했다고 하니 경기 외적인 측면을 보면 인간적인 면이 돋보이기도 하고 무엇보다 팬들의 관심을 이끌어내는 탁월한 엔터테인먼트적 요소를 지닌 감독이었기도 했다.

 

그는 격렬한 항의는 일종의 팬들의 이목을 끌기위한 퍼포먼스였다

 

하지만 가네다는 자신의 스타일과 맞지 않으면 선수에게 은퇴를 종용하거나 다른 팀으로 트레이드를 시켜버리는 등 선수와 잘 융화되지 못했다. 1974년 우승 이후 팀 전력은 점점 하락했고 1978년을 마지막으로 물러나게 된다. 1990년 감독으로 다시 복귀하지만 저조한 팀 성적으로 이마저도 2년만에 그만두게 된다.

 

가네다의 부임으로 스탠드가 만원(1973.7.10)

 

불세출의 명투수. 이젠 노인이 되다.

 

이렇게 파란만장한 야구인생을 보낸 가네다였지만 세월앞에는 그 누구도 장사가 없다. 

노년기에 접어든 가네다는 감독 은퇴 후 별다른 요직을 맡지 않았다. 야구계 레전드 OB경기나 명구회(名球会) 활동을 했지만 마지막까지 현장으로 복귀하진 않았다.  

 

80대가 된 가네다(2014.7.4)

 

도쿄돔에서 경기전, 나가시마와 1타석 승부(2014.7.4)

 

가네다는 스프링캠프나 행사, 경기 식전 행사에 자주 모습을 보였다. 자신을 매스컴에 적극적으로 노출시키진 않았지만 그렇다고 야구계에서 발을 떼진 않았다.

 

일본은 경기 전 레전드 스타들을 초청해 과거의 명장면을 재연출하곤 한다. 위 사진은 도쿄돔에서 나가시마와의 1958년 개막전 대결을 재연출한 장면이다. 당시의 모습을 기억하는 팬들은 추억의 향수에 빠졌을 것이다. 개인적으론 우리나라에도 이런 이벤트가 생겼으면 좋겠다. 

 

젊은 시절의 나가시마, 가네다, 오 사다하루(1965)

 

이젠 노인이 된 오 사다하루, 가네다, 나가시마(2018.2.10)

 

일본은 OB경기도 상당히 많다. 역대 레전드들이 과거 유니폼을 입고 플레이는 모습을 다시 볼 수 있는 것. 요미우리 레전드로 불리는 3인이 함께 초청되었다. 한 시대를 풍미한 선수들이지만 흐르는 세월은 그 누구도 거스를 수 없다. 

 

가네다 통산 성적. 빨간색은 역대1위

 

경기전 가네다 추도식. 장소는 그가 감독을 역임했던 지바 롯데 마린스의 홈구장.

 

그의 일생을 사진으로 남긴 영상이 있어 공유한다(클릭).

그의 생전 인터뷰 기사(클릭)

 

 

한 시대를 풍미한 희대의 명투수.

 

뛰어난 재능을 가지고 태어났고 스스로를 철두철미하게 관리했으며 실력으로 모든 것을 증명해 냈다.

그리고 많은 부와 명예, 인기를 누렸다.

 

 

하지만 그 누구도 세월의 흐름을 거스를 순 없다.

위대한 기록을 남긴 야구인이었지만 인간의 삶엔 언젠가 끝이 온다.

그 역시 한 명의 인간이었다.

 

그의 투구를 보며 자란 세대는 아니지만 기록을 통해 그가 얼마나 대단한 투수였는지 알 수 있었다.

독불장군인 성격으로 마찰도 많았지만 그가 가진 집념과 노력, 자기 관리는 후대에 많은 가르침을 주었다.

 

지금은 투수 분업화가 철저하기 이뤄지기에 앞으로 400승은 나올 수 없다.

 

불멸의 기록으로 남을 통산 400승.

천하를 호령하던 불세출의 명투수.

 

 

삼가 고인의 명복을 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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